문화물들/여행2018.10.10 02:24

0. 어느날 훌쩍 들른 도쿄여행은 내게 축복이었다.


원하는 것을 생각만 하면 그게 바로 내 앞에 나타났다.


원하는 재질과 무늬, 두께의 레깅스가 있었는데, 우연히 내가 머릿속에서 그리던 그 레깅스를 발견했다. 


꼭 다시 마시고 싶었지만 구하기 힘든 사케가 있었는데, 어느날 밤 숙소 근처 산책을 하다가 편의점에서 그 찾기 힘든 사케를 발견했다.


야채를 찍어먹을 다양한 맛의 소금들을 구입하고 싶던 차에, 소금전문점이 나타나는 식이었다.


놀라웠어. 시크릿? law of attraction?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늘이 다 갖다주는 것 같은 기분이었지.





그런데, 


막상 내가 그렇게 원하던 것들을 손에 넣고 나니, 


그것들은 내 머릿속에 있던 이상적인 상태와는 달랐다.


레깅스는 긴장감 없이 늘어져 뚱뚱해보였고, 


사케는 내 기억과는 달리 끝맛이 너무 달아서 먹기 힘들었으며, 


소금전문점에서 맛본 매실소금이나 녹차소금도 예전 내 기억과는 달리 그저 평범한 양념 맛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오랫동안 찾아헤매던 걸 쉽게 쉽게 찾아냈으니 기뻐하고 싶었지만, 


나는 스스로를 속일 수 없었다.


원래 그다지 훌륭한 물건이 아니었음에도 그동안 판타지 추억보정으로 포장했을 뿐이었구나.


아니면 막상 손에 넣고 보니 허무한 것뿐인 건가.




1. 원하는 게 또 있었다.


최근 다이어리 대신에 미니 수첩 여러권을 갖고 다녔는데, 


그 미니수첩들을 한꺼번에 감싸 묶을 수 있는 커버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곧 눈앞에 나타났다.


어느 서점에서 도장 파주는 아저씨의 영업질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아저씨 뒤로 일본 작가 이름과 책 이름이 프린트된 북커버가 진열돼 있었다.


내 미니수첩을 꺼내 크기를 비교해 보니, 사이즈가 완벽하게 잘 맞았다.


내가 쓰는 미니수첩은 흔한 사이즈가 아니라서 이렇게 완벽하게 맞기 힘든데 말이다. 


이번에도 다시 내가 원하는 게 정확히 나타난 거야. 


더 투정하지 말고 얼른 골라봐야지.





여러 북커버 디자인들 중에 유독 눈이 가던 건, 


'Matsuo Basho'라는 작가의 'A Narrow Road to the Deep North'였다(북커버 디자인이 영어로 돼 있더라고). 


일본작가에게 별 관심이 없어서, 마츠오 바쇼가 누군지도 잘 몰랐고, 그냥 솔직히 개그만화보기좋은날에 나온 캐릭터-_-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왼쪽 눈물 흘리는 아저씨가 바쇼.jpg




오쿠노호소미치? 깊은북쪽으로의 좁은길?!이란 책도 뭔지 잘 몰랐다. 


그러나, 하필이면 평화롭고 좋아 보이는 다른 타이틀들을 두고, 


이렇게 딱 봐도 가시밭길스러운 타이틀 디자인을 만지작거리는 나 스스로가 갑자기 한심하게 느껴졌다. 


아니 왜 나는 항상 삽질을 자처하지? 


항상 쉬운 길을 내버려두고 이상한 길을 부러 택하는 스스로의 삶의 방식을 돌아보게 되더라.


"아오 나새끼야 좀 다른 걸 고르라고"


조금 더 힘차거나 평화로운 제목의 북커버를 고르려했으나, 이상하게도 도저히 다른 타이틀에는 눈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은 그냥 북커버를 사지 않고 서점을 나와버렸다.


이번에도 손에 쥐어준 걸 그대로 던져버린 거지.





2. 

내가 머물던 곳은 도쿄의 고토구. 


한자로 강의 동쪽, 강동구라고 쓴다. 서울의 강동구와 한자가 같다. 


실제로 서울 강동구와 비슷하게 도심은 아니고 주거지역이며 조용한 분위기다. 


나는 스미다가와의 지류쯤 되는 강 앞의 게스트하우스겸 호텔에 머물렀다. 


깨끗하고 세련되고 조용한 호텔이었다. 


로비에서는 동네 예술인이 전시를 준비하고 있었고, 근처 동네의 공예품을 전시하여 팔고 있었는데, 공예품 수준도 꽤 높았다. 


2층에는 강으로 난 나무데크에서 음료를 마시거나 밥을 먹을 수 있는 펍/카페/식당이 있었다. 


강 건너가 츄오구 니혼바시, 닝교쵸 등의 지역이고 하네다, 나리타 등으로 가는 리무진 버스가 정차하는 도쿄시티에어터미널(TCAT)이 자리잡고 있었다. 


TCAT까지는 걸어서 15분 정도였지만, 이러나 저러나 고토구는 조용했다.


고토구 자체도 조용한데 내가 있던 키요스미시라카와 인근 동네는 더더욱 조용한 주택가였다. 


근처에는 가족단위가 사는 맨션들이 있었고, 중고등학교가 있었다. 


밤이면 온동네가 까맣게 조용해졌다. 


하늘을 올려다 보면 형광등처럼 퍼런 별빛이 반짝였다. 


지구가 멸망한 듯한 고요함이 느껴졌다. 이상한 소름이 돋는다.




여기 오는 순간부터 주택가 특유의 안정감과 함께 약간의 숨막힘을 느꼈다. 


모든 게 굳어지고 고정돼서 변화는 커녕 그대로 성숙 혹은 썩어가는 느낌. 중년 여성의 장미향 분냄새 맡는 기분.


조금 걸어나가면 '후카가와'라는 곳이 있고 시라카와 정원이라는 꽤 유명한 정원이 있다고 한다. 


그 근처에는 유명한 커피숍들도 있다고는 했으나 당시에는 몰랐다. 


이 답답함을 해소하고 싶었다.


뭔가 자연물이 필요한 걸까.


그래서 시라카와 정원이라는 곳으로 슬슬 걸어가봤다.




유명하다는 시라카와 정원에는 중노년 일본인들이 많이 산책 나와있었다.


꽤 큰 규모에 잘 만든 정원인 것은 확실했으나, 역시 알 수 없는 숨막힘은 마찬가지였다. 


이 세상을 작은 정원 안에 축소판으로 우겨넣고 즐기는 모양새가, 놀이동산에 있는 느낌이었다. 


실제 세상이 아니면서 실제 세상을 예쁜 모습으로 가장하고 있잖아. 


일본 곳곳의 쇼핑몰이나 위락시설을 볼 때도 이런 느낌이었어. 


현실을 외면하고 잘 꾸며놓은 곳에서 그게 진짜인양 놀고 있는 느낌.


정원의 푸르름과 정갈함에 몸은 상쾌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그러다,


내가 서점 북커버 디자인에서 봤던 작가 "마츠오 바쇼"의 시비를 발견했다. 




3. 

'마츠오 바쇼'라는 사람은


에도시대의 유명한 하이쿠 시인으로, 바로 그 후카가와라는 동네에서 움막집을 짓고 여러 해 은둔해 살다가 어느날 여행을 떠났다. 


바쇼는 어느날 갑자기, 길거리를 떠돌다 객사할 각오로 몇 벌의 '종이옷'을 꺼내 입고, 


부랑자처럼 후카가와를 떠나 그 Deep North를 향해 떠났다. 


Deep North(일본어로 오쿠)라고 번역된 이 곳은 센다이 지역을 의미한다. 


바쇼는 결국 그 여행에서는 객사하지 않은 채 살아남았고 다수의 하이쿠와 여행기를 남겼으나, 


결국 그 후 십년 동안 여기저기 떠돌며 여행을 하다가 오사카 근처에서 정말로 객사했다.


후카가와에 오래 살았기에 이 지역에 바쇼 기념관도 있다고 하더라.




바쇼는 한때 유명세를 얻으려 하기도, 돈을 벌려 하기도 했으나, 


평생 하이쿠를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켰으며 


한참 유명해졌을 때 갑자기 모든 걸 버리고 떠돌이 생활을 시작했다. 


뭔가를 타고 다니지도 않았고, 노쇠해서 힘들어도 자기발로 걷고 기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발로 땅을 밟고 느끼고 움직일 때 


정말 살아있음을 느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4.

바쇼의 시와 이야기를 읽어보면서 나는 울컥 기분이 나빠졌다.


이거 뭐냐. 


지금 기준으로는 딱 노숙자잖아.


그리고 지금 그렇게 발닿는대로 산다고 해서 뭐라도 될까? 뭐 하는 짓이야?




내가 이렇게 유치하게 반발하며 기분이 나빴던 이유는, 


사실 바쇼의 삶이 내가 남몰래 속으로 품어온 소망, 그리고 그 소망대로 살았을 때의 현실적 결말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5. 

어릴 때 말못할 내 꿈은 음유시인이었다.


음유시인은 혼자, 혹은 마음 맞는 동료 하나쯤과 함께 여기저기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이야기를 읊어댄다.


한국으로 보면 각설이 쯤 되려나. 


어느날 여행지의 여관에서 자신의 촌철살인 노래를 불러준다.


멍청한 인간들은 그 노래의 의미는 모른 채 신나게 술을 마시고 춤을 추지만, 구전된 그 노래의 의미를 누군가는 이해하게 된다.


이해하든 말든 상관 없다. 그렇게 표현하고 부족한 온기를 느끼고 다음날 그 모든 걸 뒤로 하고 훌쩍 떠난다.




그렇게 여행하고 놀면서 돌아다니면 신이 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실은 지금도, 비행기를 타고 어딘가 아무도 나를 모르고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내려, 


온전히 내 발로 땅을 밟고 그 감각을 느끼며 머리를 비운 채, 


발이 닿는대로 그냥 바람이, 태양이 - 아니 잠깐 난 햇볕 싫어하니 이건 빼고ㅋ- , 우연이 이끄는대로 움직이고 싶었다.


그러다 밤이 되면 그대로 바깥에 누워 별을 바라보고 잠이 드는 거다. - 건조하고 안 추운 곳에 가야겠군 - 


그렇게 온전히 내 세포 하나하나로 살아있는 걸 느끼다가, 


어느날 홀연히 가버리는 것. 


이거야 말로, 내 삶의 한 순간 한 순간을 몸과 마음을 바쳐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 아닐까.




마음에 드는 레깅스를 사고, 전문 소금을 고르며, 입맛에 맞는 사케를 구입하는 것이 


결국 내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하단 말인가.




6.

그런데, 나는 너무 많은걸 보고 듣고 배웠다. 


그게 바로 노숙자라는 거. 


도시에서 노숙자는 비둘기와 비슷하다. 


때로는 동정을 느끼기에 부러 괴롭히지는 않지만, 불편하고 더럽기 때문에 눈길을 주지는 않는다. 


내가 그렇게 살아간다면 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도태된 존재가 될 것이다.


지금은 그렇게 살아갈 수 없다고.





그래서 지금, 내가 가장 살아있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바소는 나를 다시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p.s. 원래 도쿄 고토구 일대에 머물며 시라카와, 오랜 역사의 후카가와일대, 후카가와에도자료관, 고토구도서관 등을 산책한 기록을 쓰고 싶었는데 마음이 산란해서 그러질 못했다. 그 정보는 아마도 나중에?


에도자료관은 아주 좋았다. 볼거리가 많은 게 아니고, 자원봉사자 노인분에게 감사해서. 급히 외운 듯한 영어로 나를 안내하다가 긴장감과 체력고갈로 거의 숨넘어갈 뻔하셨다 -ㅅ-;;


고토구는 위에 괜히 갑갑하다고 개지랄 떨어놨지만, 나는 원래 그렇게 조용하고 잘 정돈된 곳에 가면 상습적으로 지구멸망 개지랄 떠는 중2병이고 사실 조용한 것 좋아하는 사람들은 머물기 좋은 곳이다. 


여기서 쇼핑하려면 전철 한 번에 스카이트리로 가면 되고, 그 안에 모든 것이 다 있기 때문에 시내중심가로 갈 일이 없다. 

Posted by intp l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