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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물들/기타 일상 잡것들 리뷰

[이 시대의 알레고리] 임을위한 행진곡이 울려퍼졌던 그 자리

꽤 됐는데, 그 충격적인 장면에 피식거리고 머리에서 몇 번이고 재생하다가 너무 명장면이라 남김.



햇볕이 따가운 어느 오후, 사람도 별로 없는 평화로운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근처에서 커다란 '임을위한행진곡' 소리가 들려왔다.


많이들 알겠지만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0년대 이후에 시위할 때 가장 많이 불려온 노래 중 하나. 뭐 최근 갑자기 논쟁 대상이 되는 것 같던데 -_-


아무튼 무슨 시위라도 하나? 하고 둘러보니 신호를 받고 서 있는 웬 트럭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였고, 그 트럭에 붙어있는 현수막.




[ㅁㅁ아파트 개발계획 중단에 대해 서울시는 책임져라]

 - BGM : (비장한 톤으로)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







응?????????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니까, 재개발계획 무산돼서 집값 오를 기회를 놓쳐 빡친 주민들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매우 비장하게 틀어놓고

시위중인거다.

무슨 생존권 이런거랑 관계 없음. 그냥 매우 평범한 아파트.


그렇다고 자기가 나서서 열정적으로 시위하고 싶진 않으니깐 전부 생업에 종사하러 나가버리고, 아마 이 시위트럭은 고용된 사람이거나 누구 할일없는 사람이 대표로 몰고 돌아다니는 모양. 외롭게 지나가는 작은 포터트럭에서 흘러나오는 저 전혀 상관없는 맥락의 우렁찬 행진곡. 그리고 무관심한 행인들. 




아...............진짜

그냥 감동해버렸어.


이 장면이야말로 현재 사람들의 평균적인 정치사회경제인식이란 것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예술적인 장면이다. 시위의 주제, 시위에 쓰인 음악의 맥락의 말도 안되게 부적합함, 쥐새끼 한마리도 없는 시위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평화로운 풍경, 그리고 햇님은 방긋 공기는 이글~~~, 너무나도 정돈된 하얀 횡단보도와 아스팔트 ^_____^



... 아 이 부적합함이 모여 만들어낸 신비로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미안하지만 백 투더 몇년 전(사람들이 이 나라의 정치인식에 대해 희망을 품고 있었던 모년 모월까지)도 포괄할 수 있는 아주 상징적이고 압축적이고 아름다운 장면인 것이다. 




내가 표현능력만 있었더라면 그림 음악 사진 등 정말 여러 방식으로 이 강렬한 느낌을 표현해 낼텐데 뭔가 아쉽다.

그래서 '문화물 감상' 카테고리에 남김.



쩝 글로 쓰니 강렬함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