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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생각들

보면 불편한 것들을 핑계삼기

1. 불편함을 느끼는 순간들


불편하다기보다는, 감수성이 너무 깊이 치밀어 올라서 일상생활이 힘든 정도의 상태가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니까, 어떤 영화나 책이나 장면이 마음 속 무언가를 건드려 복잡한 감수성이 치밀어오르게 되고, 그 감정 상태가 꽤 오래가서 그동안은 생산적인 활동을 하기가 힘든 것이다. 그냥 모든 것이 무의미하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 되니까.


언제 그런가 생각해 보면, 

영화/책의 스토리라인이나 주인공 설정에 감응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불합리한 세상에서 정신적으로 좀체 적응하지 못하다가 홀연히 어딘가 떠나가는 사람에게 자주 감응한다. 현대물일 경우엔 영화 판타스틱 소녀백서나 소설/영화 '세월(the hours)'. 고전물의 경우 Sir Thomas Malory 버전의 아서왕의 죽음. 성배라는 뜬구름(혹은 진리)을 찾기 위해 모험하던 아서왕이 죽기 전 엑스칼리버를 호수에 반납ㅋ하고 배에 실려 떠나가는 장면을 상상하면 가슴이 아려온다.

일상에서 만나는 어떤 상황의 분위기나 특정 순간일 때도 많다. 예를 들어 조용한 밤에 별을 봤을 때라던가, 노을 보고 찡한 것. 싸구려 전구의 반짝임이나 흐드러진 벚꽃을 보고 경외심을 느끼는 것. 

문화물이든 일상의 한 순간이든, 이런 순간을 마주할 때면, 일상은 거짓이고 주인공이 떠나가는 보이지 않는 그 곳이 영원함/진짜인 그 무엇과 연결돼 있다는 느낌이 든다. 종교를 가진 사람이라면 이 순간 신의 현신을 느꼈다고 말할 것이다. 속세에서 성스러운 영원함을 느끼는 순간.  



그래서, 그동안, '나는 참 감수성이 예민하구나' 하고 단순하게 생각해 왔다.



2. 감수성이란 핑계, 진짜 내가 타고난 - 그러나 포기하기 힘들어 때로 의식으로 치고 올라올 정도의 강렬한 - 욕구란 무엇일까


그런데 이 감수성이란 것도 교묘한 도피의 핑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내 마음 속에도 이루지 못한 것, 이룰 수 없는 것, 상처로 남은 것들이 있다. 현실적으로 이룰 수 없거나 생각하기 괴로워서 내버려 둔 것들이다. 이미 내 손으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문제이기에, 나는 이 상처들을 마주할 용기가 없고, 덮어 놓고 도피하려 한다. 


그러나 어떤 영화를 보거나 장면을 보다가, 이렇게 덮어둔 상흔을 건드릴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그동안 속에서 썩고 문드러진 상처가 풍부한 감수성ㅋ으로 포장되어 드러나는 것이지.

그러므로 당연히 이 감수성이란 도피심리와 연결돼 있을 것 같다. 마주하고 싶지 않으니 도망가겠다는 심리. 그래서 저 위에 내가 감응한다고 쓴 내용들이 다 속세를 떠나 어딘가로 (좁게는 그냥 다른 나라나 다른 지역, 혹은 아예 차원을 이동한 영원의 순간) 김도망한다는 내용인 거다.



... 쓰고 나니 그건 아니다. 도피 자체가 내 마음 속 억눌린 욕구를 반영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 내가 타고난 욕구 자체가 '어디론가 새로운 곳으로 떠나고 싶다'는 것이라 도피스토리에 감응한다는 거다. 실제로 내가 어려서부터 좋아했던 것들은 거의 상상월드나 신비의 보물섬, 고딕월드를 찾아가는 내용들이었다. 아무데나 그냥 막연히 먹고 살기 좋다고 알려진 곳으로 떠나는 게 아니라, 삶의 본질(뭔가 돋지만 계속 써보자)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가고싶은 욕구다. 삶의 본질을 느낄 수 있는 곳이란, 'ㅇㅇ인 척'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행동해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며, 심지어 추상적인 의미의 깊이 있는 자아찾기를 권장하는 그런 곳이다. 나 자신, 있는 그대로가 바로 삶의 본질을 보여주니까.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나는 또한, 새롭고 재미있는 것들을 통해서 어떤 의미를 찾아내고 싶어한다. 먼저 나 자신을 이해하고, 내가 반응하는 세상을 이해하고 싶어한다.



그러니까,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욕구 자체는 결국 내 삶을 관통하는 본질, 진리를 재미있는 방식으로 발견하고 싶다는 욕구와 연결된다.



3. 그래서 어떡해야할까

혹자는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다. 이렇게 가슴 속 깊이 아쉬움이나 상처로 남은 것들이 삶을 입체적이고 풍성하게 만들어 준다고.

그럴 수도 있지. 내가 예술가라면 아마 저런 상처를 도의적으로 이용할 수도 있겠다. 물질이 발효되면 굉장히 풍성한 맛을 낸다.

그렇지만 나는 예술가가 아니고 건강하게 살고 싶은 그냥 보통의 닝ㅋ겐ㅋ일뿐이다. 건강하게 살기 위해 살을 관통하는 본질적인 것을 찾고 싶고, 그래서 스스로를 속이는 짓은 하기 싫다.



이런 것에 쉽게 휩쓸리지 않는 방법은,

상흔을 마주하고 내 진짜 욕구가 뭔지 정확히 찾아내는 것, 그리고 현실의 장애가 무엇이든 맞서서 하고픈대로 해버리는 것이겠지. 

여기저기로 떠남 자체가 내 욕구라면 정말로 어딘가 떠나버리면 되겠다. 

다양한 재미와 즐거움을 통한 삶의 본질 발견이 내 욕구라면, 일상에서라도 삶을 관통하는 진리를 찾기 위해 노력해야겠지. 

아.. 그런데 여행을 떠나는 것 자체는 새로운 경험을 통해 삶의 본질을 발견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니 근본적인 욕구는 후자다.


경험상, 의미를 주지 못하는 여행은, 마약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인과 함께 가는 여행에서는 그냥 유명 관광지 찾아다니고, 다른 사람들이 현지에서, 혹은 다른 여행자가 자기 나라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느낄 수 없었기 떄문에, 의미를 찾기 힘들었다. 결국 내게 있어서 여행은 인간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원리를 발견하기 위한 하나의 (강력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현지의 삶을 가장 잘 체험하고 거기서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장기간 머물러야겠지. 사람들 속에 충분히 섞여서. 물론 그걸 못하니까 결국 쌓이고 쌓이는 것이겠지만, 못한다고 선언하고 묻어두는 것 역시 핑계인 것 같다.



앞으로도 더 생각을 거듭하다 보면, 내가 뭘 원하는지가 더 명확히 보일 것이다. 

명확하다는 게 구체적이라는 의미는 아니지만, 상관 없어.

아무튼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뭔지 찾아내자.

삶에 잡음이 너무 많아. 

엄밀한 의미의 정신적 독립이 쉽지 않다.






p.s. 일상에서 내가 무의미해보이는 행동을 하는 것들도 다 저 도피심리로 설명된다. 서점이나 도서관을 헤매는 것이나 뭔가 하겠다고 낯선 장소로 짐싸들고 다니는 것들. 심지어 지속적으로 꾸는 꿈들도 모두 연결돼 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도피심리가 깔려있다고 무작정 물리적으로 어디론가 떠나는 것만이 해결책은 아니니. 도피를 해서 내가 찾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일까. 언제나 기분 좋은 놀라움을 느끼는 것? 삶의 새로운 면을 계속 발견하는 것? 과연 삶을 관통하는 진리같은 걸 발견하는게 내가 원하는 게 맞을까? 



p.s.2. 지금은 죽은 심리학자인데 이름이 생각이 안나네..;; 암튼 그 사람이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삶은 하강하는 과정이라고. 

점점 아래로 내려가, 온전한 현실을 맞아 구체화하는 과정이라고. 책에서 할리우드의 유명인사들을 예로 들었는데, 한 명은 화려하게 할리우드의 환상 속에서 살다가 그 환상속에 머무르려는 마음 속 도피심리로 인해 약쟁이가 되고 복잡불행하게 살았으며, 다른 한 명은 사회문제에 개입하게돼서 가장 밑바닥 타인을 돕고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했다고. 그러니까 전자는 하강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며, 후자는 제대로 온전히 현실의 가장 밑바닥에 땅을 디딘 것이라고.

이전에도 썼지만, 내가 땅에 발을 디디지 못하고 떨어져 있는 느낌이었는데, 그냥 삶은 결국 어디에, 어떻게 착지하는가가 관건인 것 같다.



p.s.3. 내 도피심리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거였고, 전혀 새롭지 않다만, 결국 이렇게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는 걸 새삼 생각해보니 참... 내가 하잘것 없는 인간인 듯하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인간이란 하잘 것 없고 새로울 것도 없는 거다.



p.s.4. 그러고 보면 감수성 때문에 '생산적인 활동'을 하기 힘들다는 말에도 어폐가 있다. 생산적인 활동이란 궁극적으로는 내가 원하지 않지만 하고 있는 일인 거다. 이걸 '어쩔 수 없다'라며 외면해야할까? 결국 성장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받아들이고는 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