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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물들/보고듣기(영화,애니,공연)

막장드라마 된 한국 엘리자벳 다시 감상기

간만에 엘리자벳 공연을 본 후기다.


1. 일단 나는 엘리자벳의 오랜 팬이다.

나는 딱히 뮤지컬 팬은 아니지만 가끔씩 몇몇 뮤지컬을 재밌게 본다.

그 중에 엘리자벳을 특히 오랜 세월 좋아해왔는데, 

그러다 보니 어린 시절 엘리자벳 공연을 보고 흥분해서 ㅈㄹ대는 글을 남긴 적이 있었다. 

어린 시절 나의 순수한 덕심과 분노는 아래 세 개의 링크 글에서 확인할 수 있겠다.


http://intpland.tistory.com/48   

http://intpland.tistory.com/52

http://intpland.tistory.com/53


ㅈㄹ댄 이유의 태반은 당당하고 자유로워야 할 엘리자벳이 지나치게 한국화돼서 갸륵한 병신며느리처럼 그려졌으며, 

이 극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세쿠시한 토드(죽음)가 무매력 장승백이처럼 나왔기 때문이다.



2. 엘리자벳을 오랜만에 다시 봤는데, 먼저 배우에 대한 감상.

2018-2019 엘리자벳 공연의 주요 캐스팅:

엘리: 김소현, 신영숙, 옥주현.

토드(죽음): 김준수, 기타.

루케니: 박강현, 기타.


....그렇다. 이번 공연의 의미는 김준수와 박강현의 발견이었다.


[김준수]

예전에 김준수가 토드 역할을 잘 한다는 명성은 듣긴 했지만, 유튜브를 보면 좀 어설퍼보였고 취향이 아니었다.

게다가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마테카마라스를 벤치마킹했다고 하더라고. 

카마라스가 좀 살쾡이 같은 반항 청소년 스타일인데, 나는 이렇게 방정맞은 틴에이저 취향은 아니거든?

어젯밤 밤사에서 만난 친구엄마 협박하러 간 삘의 남성분이 마테 카마라스.jpg


근데 제대 후 한결 물이 올랐다는 소문을 들어 궁금해지더라고. 

한때 유튜브에서 한참 핫했던 비단길 같은 신기한 대륙탐험 노래도 발표하고 말이지.

그래서 김준수 토드 공연을 봤는데, 


아니 시발 마테카마라스 같은 애새끼랑 비교를 해???? 다 씹어먹는다. 솔직히 너무 잘해서 깜놀했다.


절대적인 노래 실력이 훌륭하다기보다는, 죽음 역할을 가장 유혹적이고 섹시하게, 잘 해석해서 표현하고 있더라.

마치 엘리자벳한테 공사친 호스트같다.

목소리도 독특하고, 표현력도 좋은데다 무엇보다 제대로 몸 쓰는 법을 알고 있었음. 

작은 손짓, 고갯짓 하나로 무대를 제압하는데, 이건 아이돌 생활 오래하면서 무대를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한 요령이 붙어서인 것 같다.

그래서 아마 역할 소화 범위가 넓을 것 같진 않고, 초현실적 캐릭터 위주로 서게 될 것 같긴 하지만(실제로도 그렇더라) 

그래도 내가 바라는 세쿠시한 토드 역할을 잘 그려내줘서 고마웠음.



오히려 마테카마라스보다는 이 분이 떠오르더라고. 올렉비닉.

이분이 성숙한 섹수머신 록커 이미지라.

김준수는 이분보다는 훨씬 사신+악마같은 이미지를 더 하긴 했는데, 그래도 느낌이 비슷하다.

눈빛으로 이미 섹수머신 올렉 비닉.jpg



가끔 웹에서 아이돌 출신을 배척하고 정통 뮤지컬 외길 인생을 걸어온 배우 설 길이 적어진다고 부들부들대는 글을 볼 때도 있는데, 

누구의 팬도 아닌 입장에서 그런 선입견 가진 글 보면 좀 우습다. 지금의 힙부심, 예전의 락부심 보는 느낌이랑 유사하달까.


여하튼 설마 김준수에게 토드 역할로 딴지 거는 닝겐은 지금은 없겠지? 적어도 내가 지금까지 한국버전으로 본 토드 해석중에 최고던데?



[박강현]

나레이터 역할인 루체니 역을 맡았다. 

예매할 때 루케니 누가 하는지 관심 없었는데, 인터미션 때 배우 확인하러 뛰쳐 나갔음. 루체니 역이 너무 잘해서.

아니 막 욕이 절로 나올 정도로 존나 잘한다.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표현이 됨. 발성 딕션 성량 다 좋고 연기도 개좋음. 노래를 안 배웠다니 믿을 수 없었다. 안배우고 저렇게 하다니 천재 아닌가 싶음.

이번 18-19 무대 연출 특징이, 루체니가 너무 많이 끼어드는 것이라(특히 최근 무대) 웬만하면 좀 짜증날 수도 있다. 근데 박강현이 너무 자연스레 잘 하니까 안 짜증났음. 

분명 연극스러운 말투를 사용하긴 하는데 어째서 박강현 연기가 이렇게도 일상어 같고 자연스럽게 느껴질까 궁금했는데, 

무대에서 긴장을 안 하는 것 같다. '특별히 뭐 해야겠다 긴장 뽝!!' 이런 자의식이 없는 것 같음. 그래서 편하게 연기를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싶다.



[김소현]

엘리자벳은, 김소현과 옥주현 것을 봤다. 

신영숙 공연은 내 취향이 아닐 것 같아서 패스했다. 엘리자벳은 자유롭고 예민한 영혼인데, 신영숙이 공연하면 뭔가 비장하고 성숙한 명성황후 삘 날 것 같았거든. 그리고 김준수와 케미 상상이 잘 안됐음. 신영숙 공연 본 다른 사람들 이야기 들으니 내 느낌과 대충 비슷하다.

김소현은 알다시피 엄청 동안에 작은 몸집, 소프라노다. 소녀같은 느낌. 

사실 개인적 취향은 고음보다는 중저음 풍부한 소리쪽을 선호한다. 또한 김소현 소리 내는게 가끔 좀 불안하기도 하고, 옥주현을 꾸준히 좋아해 오기도 해서 김소현에게 큰 기대를 하진 않았다.


어 근데 이번에 김소현 엘리자베트 정말 좋더라.

김소현에게 아이가 있어서 그런지, 2막에서 아들 죽고 나서 엘리자벳 빙의한 듯 잘 하더라. 감정선이 장난이 아니어서 김소현 배우가 숨만 쉬어도 같이 슬퍼서 울었음.

그리고 김소현은 어딘가 단단한 느낌이 있어서, 유약하게 휘둘리는 느낌을 주지 않았기에 더 좋았다. 

김준수와 케미도 좋아보였음. "내가 춤추고 싶을 때" 김준수와 페어로 부를 때 최고였음. 이 장면은 옥주현-김준수 페어보다 훨씬 나앗음. (연출 차이일 수도 있지만)



[옥주현]

옥주현 실력이야 최고지만, 예전에 본 엘리처럼 갑갑한 연기를 할까봐 조금 두려웠음. 

사회에 휘둘리기만 하는 유약한 엘리를 돈 내고 보고 싶지는 않아서.


음 근데...

이번에 옥주현 엘리자벳을 평가하기가 어렵다. 

아 물론 옥주현은 언제나처럼 잘한다. 표현력, 춤, 연기, 노래 다 좋다. 

아이돌로 무대경험이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어떻게 돋보일 수 있는지에 대한 감이 있어서 그 점이 더 좋다. 


근데 평가하기 어렵다는 건, 옥배우 개인에 대한 건 아니고 연출문제다.

김소현 엘리자벳은 개막 초반에 봤고, 옥주현 엘리자벳은 개막 거의 막바지에 봤거든? 

근데 그 사이에 연출 방향이 너무 바뀌었음.

내용이 완전 막장이 돼 버렸거든.




3. 연출

아 여기서 '막장'이라고 나쁘단 의미는 아니다. 매우 극적이고 사건이 빵빵 터진다는 의미. 

일단, 김소현이 등장한 극은 죽음이 전면적으로 나타나는 게 아니라, 배경에만 가끔 등장하는 정도였는데, 

옥주현이 등장한 극은 전형적인 한국의 막장 드라마가 됨. 아니 ㄷㄷㄷ 몇 주 안 된 것 같은데 이렇게까지 연출이 바뀔 수도 있는 건가 싶다 ㄷㄷㄷ 

무능한 남편의 배신 + 세쿠시한 유혹의 토드씨 = 본격 삼각관계 치정극이더라ㅋ.  여기에 미친 시애미의 막장음모와 중이병 아들의 자살까지 더해져서 완벽한 가족막장극.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엘리자벳 극의 의미는 죽음과 삶의 양면성, 거대 구조 안에서 자유롭고 창의적인 개인 영혼의 사망 or 구원이다.

그런데 앞에 썼듯이, 연출이 치정막장드라마 내용을 강조하려다보니, 원래보다 죽음씨의 등장 비중을 높여야 했다. 그래서 초반 극(12월~1월초 공연시)에 등장했던 감정적 은유씬들이 우선 사라졌음. 예를 들어, 노년의 황제와 엘리자벳이 호숫가에서 대화를 하는 씬에서, 배가 떠내려가며 그들 사이를 연결하지 못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이런 장면은 황제와 엘리자벳이 다시 서로 마음을 연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은유하며 쓸쓸함을 더해주는 장치였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섬세한 씬들이 모두 생략됐음. 하... 욕좀 하자. 씨발

또한 정치적, 사회적인 배경씬과 조연들의 출연씬들이 한층 생략되거나 속도가 과하게 빨라졌다. 그러다 보니 앞에 쓴 이런저런 의미들을 생각하거나, 인물들의 감정적에 동화될 여지가 없더라고. 하... 


이렇게 막장 스타일로 전개가 바쁘면 개개의 사건들이 알기 쉬워야 한다. 따라서 애매하던 선악이 더 강조됐음. 그래서, 엘리자벳 시어머니인 소피가 한국식 막장드라마의 못된 싸모님처럼 묘사되더라고. 사실 내가 생각하는 소피는, 개인이 나쁜게 아니고 그냥 궁중이라는 거대한 구조를 표현하는 존재일 뿐이다. 그래서 우아하고 위엄있게, 그러나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것으로 구조의 일부가 되어 어떤 개인을 숨막히게 하는 그런 다면적인 존재가 돼야 한다. 그러나, 이번 연출에선 그냥 천박한 갱냄 아줌마가 돼 버렸다.


그래서 천천히 극을 감상하며 이것저것 생각하기 좋아하는 내 취향엔 옥주현이 등장한 2월 극의 막장 신파 연출이 너무나도 안맞았다.



[옥주현 vs 김소현]

음... 일단 김소현과 옥주현 엘리자벳 역할을 비교해볼까 했는데, 두 극이 너무나 달라서 ㅋ 비교를 못 하겠다. 

감정선 자체는 김소현이 좋았던 것 같다....만 그것은 연출때문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젠장.

뭐, 적어도 2막에 아들 죽었을 때는 김소현이 확실히 최고였음. 




4. 종합적으로

일단 종합적으로는 예전에 욕질했던 것보다 캐릭터 해석은 훨씬 좋아지고 배우들도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후반부에 연출이 한국스타일 숨가쁜 막장 스토리로 구성돼 버려서 매우 아쉽다.

이게 연출방향을 이렇게까지 극적으로 바꾼 이유가 뭐지 ㄷㄷ 배우들이 힘들어해서 그런가 아니면 연출가가 막장드라마에 꽂혔나. 여튼 존나 마음에 안 든다. 

그래도 최소한 극을 토드-엘리 중심으로 끌고 나간 것은 뭐 좋은 것 같다. 하기야 바쁘고 긴박하고 쉴틈없이 빵빵 터뜨려주는 것 좋아하는 한국인의 일반적인 정서에는 잘 맞는 로컬라이징을 한 듯. 

단지 나는 이따위 연출이라면 다시 안 본다. 12월이나 1월초반까지의 연출방향이라면 최고고요.




p.s. 전에 한국 창작 뮤지컬 프랑켄슈타인 봤을 때도 너무 숨가쁘고 쉬어갈 틈 없어서 죽는 줄 알았는데, 이게 한국적 연출의 특징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들 숨은 쉬며 살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