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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생각외마디

인형의 집으로 돌아오세요

*

헤르멜과 아이들을 떠난지 3주 만인가.

집으로 돌아온 노라가 문을 열어보니 아무도 없었다. 

벌레 몇 마리가 벽에 붙어있다가 원을 그리며 날아올랐다.

 

노라는 기름이 굳은 접시가 수북이 쌓여있는 싱크대로 다가갔다.

싱크에 걸린 고무장갑을 집어들자, 접시에 앉아있다 놀란 날벌레 이십여마리가 후두둑 날아올랐다.

통통하고 작은 벌레들이었다. 수도에서 나오는 물때문에, 다시 접시에 앉지는 못하고 노라의 눈 앞을 천천히 맴돌았다.

 

그렇게 노라가 인형이 되길 거부하고 집을 나간 후에도, 접시들은 버젓이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계속 쌓여가며 노라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엔 이걸 치워야 하는 사람은 너야 노라.

내가 먹고 남은 음식물과 찌꺼기, 그리고 처리가 늦었을 경우 잔여 곰팡이까지 처리해야하는 건 결국 너라고. 노라.'

 

헤르멜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

삼주 전 노라가 남편과 아이들을 떠났을 때, 그는 절친한 친구 델라를 찾아갔다. 델라는 처음엔 따뜻하게 노라를 맞이해주었으나 일주일 쯤 지나자 이 친구가 귀찮아졌다. 델라는 현실파악을 못 하는 이 친구에게 따끔한 충고를 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봐 노라, 솔직히 너 너무 심한 거 아니니? 네 남편이 그동안 너에게 해준 걸 생각해봐. 넌 그에게 뭘 해주었니? 어쨌든 너도 잘못한 일인데 네 책무를 버리고 그렇게 뛰쳐나오는 건 너무 이기적이야.'

 

노라는 그의 절친한 친구 델라가, 주고받음의 관계 외 이면을 볼 수 없다는 것을, 그러니까 절대로 노라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델라는 노라의 비현실적인 태도에 따끔한 충고를 해 주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

결국 친구 중 아무도 노라를 이해해 주지 않았다.

그들은 '헤르멜과 노라 중 누가 더 잘못했는지'를 논하려 하거나, 노라가 헤르멜의 '심한 말'에 받았을 상처를 걱정했을 뿐,

결국은 노라가 왜 뛰쳐나와야했는지, 어째서 그가 인형취급받고 사는 이 환경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저 인형의 집에 살고 있는 인형임을 행복하고 있었으며, 단지 노라가 받은 취급이 제너러스한 것이었나, 덜 제너러스한 것이었나가 문제였을 뿐이었다. 결국은 그 누구도 노라를 이해하지 못했으며, 말을 하면 할수록 노라는 보슬보슬 미친니온 취급을 당할 뿐이었다.

그러니까, 노라는 그냥 입을 쳐 다물었어야 하는 것이어씀니다.

 

 

 

****

기름이 굳어 제대로 씻기지 않는 접시를 빡빡 닦던 노라의 작은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아이씨...'

노라가 '아..'를 발음할 때, 접시 위를 맴돌고 있던 벌레 한마리가 얼른 노라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

'아웁 퉤 이게뭐야'

그런 것이다. 벌레는 노라가 삼주간 책무를 저버리고 반항했던 데 대한 벌인 것이다. 타인이 먹고 버린 썩은 음식물을 치우면서 그 현신인 벌레 한 마리 정도를 먹는 것은 그나마 가벼운 벌인 것이다. 타인의 썩은 음식을 치우며 벌레를 씹는 그런 모멸감이야말로 결국 노라에게 내려질 유일한 판정인 것이다.

 

 

 

그러니까

가능하면 빨리

 

 

인형의 집으로 돌아오세요.

 

 

 

 

 

'cause there is no ex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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