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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엉망인 것 나중에 봐도 일부러 참고 내버려두는 편인데 이건 그냥 앞뒤가 안 맞는 수준이어서 문장 일부 수정함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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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나는 서커스의 기괴함에 공포를 느꼈다.
뱀파이어나 귀신 이야기는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였다. 이새끼들은 내 방 벽장에 몰래 잠복해 있다가 나에게 해를 끼칠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내 몸만 잘 숨기면 되는 거다. 그들에게서 잘 도망가면 괜찮은 거야.
반면, 서커스는 친숙한 것에 대한 공포였다. 깨어나서는 안 될 정신의 밑바닥. 봉인이 해제되면 문명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느낌. 진짜 무서운 점은, 공포의 대상이 내 안에 있기에 도망칠 곳이 없다는 거다. 그러니까 더 근원적인 두려움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서커스물에 끌렸다.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저 기괴한 서커스의 원형을 공유하고 있을 테니까. 저게 인간의 진실이니까. 서커스물뿐만 아니라, 내가 알 수 없이 두려워한 것들 다수가 정신 밑바닥을 해제하는 듯한 공포를 주는 것들이었던 듯하다.
..
서커스를 소재로 한 조도로프스키 감독의 영화 <성스러운 피>와 비슷한 시기에 봤던 서커스 영화가 있었다.
지금은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데, 서커스, 아리아드네, 미로, 놀이공원 등의 이미지가 싸구려 필름 위에 비현실적으로 펼쳐졌다.
필름이 너무 싸구려라 화면은 더욱 기괴해보였다.
당시 어머니는 이 영화를 보고 있는 나에게 언제나처럼 화를 냈다.
"넌 왜 이렇게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은 영화만 보고 있는 거야?"
이제 알겠다. 어머니도 마찬가지로 그 영화 장면을 보며 정신의 밑바닥이 동요하는 걸 느꼈던 거다.
그 영화를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은 영화'라고 평하면서 말한 것을 보면.
...
그 영화의 제목도, 내용도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사실 서커스물은 내러티브가 딱히 중요하진 않다.
무의식 깊이 숨은 원시성, 원형/상징 이런 것들을 끄집어내는게 그 주 임무니까.
누구나 갖고 있는, 그러나 마주하기 불편한 기괴함을 마주하도록 만드는 거니까.
누가 알면 힌트라도 주면 좋겠다.(기억나는 장면은, 밤중에 허름한 놀이공원인지 카니발인지...에서, 한 인물이 아리아드네의 행방을 묻는다. 얼굴에 흰 분을 떡칠한 광대의 머리가 기분나쁘게 웃으면서 노래비슷한 걸 부른다. 사실, 테세우스와 아리아드네 신화 모티프를 차용해서 이런저런 이미지로 구현하려던 것 같았는데 묘한 기분나쁨이 느껴졌다. 지금봐도 기분이 나쁠지가 궁금하다.)
....
여하튼, 지하환등극화소녀춘미도리(영어로는 MIDORI)라는 이 1992년작 애니메이션은 오랜만에 본 살짝 맛이 간 서커스물이다.
미도리라는 어린 소녀가 서커스에 끌려가 겪는 정신붕괴 판타지.
서양식의 서커스가 아니라 지극히 일본스러운 서커스 판타지로 구현했다.
기괴한 그림체와 freak show 장면에서 정신붕괴의 과정이 잘 드러나며, 누구나의 마음 속에 숨은 그 기괴함을 대놓고 끄집어낸다.
(사실 좀 너무 대놓고 끄집어내서 보는 사람의 정신이 붕괴할 염려까진 없어보이니 안심시떼쿠다사이넹~)
극중 미도리가 정말로 서커스에 끌려간 것인지, 어디서부터 그녀의 정신이 붕괴된 건지는 생각해 보면 모호하다. 내용의 앞뒤를 따져들며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다만, 정신붕괴서커스물의 본질이란 바로 이 모호함이잖아. 어차피 그런 논리를 따지는 것이 별로 중요하지도 않다는 게 서커스물의 매력이니까.ㅋ
막말로 그냥 씨발 돌면 돈거지 뭐 언제부터 어떻게 6하원칙으로 쳐돌았나를 따져야 되냐는 것.
뭐 물론, 성진국 특유의 freak fantasy도 보인다. 촉수라던가, 어린소녀 학대라던가 뭐 그런. 정신 깊숙한 기괴함이란 어차피 성적인 요소와 맞물리기 쉬우니까.
여하튼 기괴하고 재미있다. 옛날식 그림체도 쏠쏠하게 볼만하고.
그러고보니, 사람 바이 사람으로 다르게 받아들일 것 같은데. 반응도 궁금하다.
p.s. 성정치적 잣대는 배제하고 씀. 정치적 올바름을 따지기 시작하면 못 본다.
p.s.2. 이거 만든 하라다 히로시는 5년간 자기 혼자 끄적끄적 만들었음. 당연히 펀딩따위 없ㅋ엉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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