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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물들/여행

[어쩌다 자아 찾는 여행기] (1) 로스앤젤레스의 늑대


0.

삶은 대체로 일상을 지내며 나도 모르게 천천히 변해가지만, 

가끔은 갑작스런 변화의 계기가 되는 강력한 사건이 있다.


나한테도 그렇게 갑작스레 삶을 전환하는 계기가 됐던 사건이 있었다. 

혼자 무턱대고 갔던 여행이었다.

아니, 그 여행이 계기가 됐다기보다는 그 여행으로 인해 나의 변화를 거울처럼 보고 깨달았다고 해야할까. 


그동안 어떻게든 쓰거나 말해야할 것 같았는데, 그러질 못했다. 

너무 개인적인 체험이었거든.

어떤 식으로 풀어야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무턱대고 마음에 남는 인상대로 갈겨보려고 한다. 




1. 

갑자기 조금 긴 여행을 떠나고 싶어졌다. 지금까지 내가 하고 있고 갖고 있던 모든 걸 때려치고.

주변에서 난리가 났다. 


"너 앞으로 뭐 하고 살건데?"

"정신이 있는 거니? 대체 왜 그런 짓을 하는데?"

"사람이 무슨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사니?"


무례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렇게들 참견하는 게 당연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때까지 나름 이 사회의 모범생으로 살아왔으니까. 


엄청 뛰어나진 않았어도 딱히 엇나가진 않은 그저 그런 평범한 삶. 


귀찮음을 피하기 위해 대충 평균정도는 해 주다보니 어느새 모두가 내게 관성적으로 그런 역할을 기대한 거였겠지.


그래서 주변에서도 당연히 부속품같은 모범생 새끼한테 그 기대되는 역할을 다시 한 번 강요하는 거였지.


그러니까 결국 내가 만들어왔던 것이었다. 그런 환경은. 





근데 그땐 더는 그럴 수 없었다. 


아니 뭐 나한테 딱히 무슨 위대한 철학이나 생각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시발 난 지금 떠나고 싶었고 여기가 한계인 것 같았다.


그래서, 


고깃집에서 고기를 먹다 말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시발 도저히 이렇게는 못산다고 사지를 내팽개치며 개지랄을 했다.


팔다리를 어색하게 휘두르는 와중에도 고깃집 불판에 팔다리가 닿지 않게 조심했다.  역시 나는 사고형이다.ㅋ




지금 쓰고 보니 별거 아닌데 그때는 그게 모두에게 존나 충격이었나보다.


그리고 나는 평안하게 로스앤젤레스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2.

왜 하필 로스앤젤레였냐 하면, 


내가 가고 싶은 곳들은 전부 브레끠 걸려서 못가게 됐기 때문이다. 


마적이 등장한다거나 빡빡이들한테 머가리를 털린다는지 하는 이유로.


사실 궁금해서 뱉었던 것뿐이지 꼭 그런 곳을 갈 욕심은 없었다. 


그러다 보니 급하게 선택한 곳이 로스앤젤레스. 그냥 평소에 가기 힘든 먼 데라서 어쩌다 택했다.


그리고 로스앤젤레스에서 Amtrack이라는 열차를 타고 왔다갔다 이동하기로 했다. 


그냥 예전에 짧게 여행할 때 잠깐 암트랙 탄 기억이 좋았어서.


왼쪽이 장거리 암트랙.jpg




참고로 미국 철도 암트랙은 비행기보다 훨씬 비싼 교통수단이다. 


절대가격도 비싼데다가 시간도 훨씬 오래 걸려서, 기차를 타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한 비행기를 타기 힘든 노인들 쪽이 많이 이용한다. 


그리고 출퇴근용으로 이용되는 동부쪽 암트랙 노선 등 극소수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시간도 잘 안 지킨다. 


시간 안 지키는 스케일이 몇 시간 단위다. 열차도 하루에 한개 며칠에 한 개 이런 꼴ㅋ. 


뭐 그래도 일찍 사면 살수록 가격이 할인되기도 하고, 외국인일 경우 별도의 할인 패스를 발급해주기도 하고 그렇긴 하다. 


그렇지만 나는ㅋ, 



할인 1도 없이 가기 전날 예매했다. 그냥 쌩돈 존나 많이 내고.

혹시라도 암트랙 탈 사람들은 이런 미친짓을 하면 안 된다.

단순 이동이라면 암트랙보다는 비행기 타는 걸 당연히 추천하고.


지금 보면 미친짓인 거 아는데, 그냥 그때는 시발 될대로 돼라 싶어서 그렇게 했다. 




3. 

비행기 타는 날이 되니까 흥분되더라. 


잡지를 읽는데 마침 마크트웨인의 글이 나오더라고. 


그러고보니, 허클베리핀이 남부를 쭉 돌아다니던 로드트립도 생각나고, 나도 그런 여행을 하려나 기대되기도 했다.


옆사람이랑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재밌는 여행을 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도 되고. 



근데 ㅆㅂ 인팁히키코모리 성격이 어디가겠냐.


옆사람한테 입도 뻥긋 안 하고


그대로 조용히 자다 깨다 10여시간을 비행해서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했음ㅋ. 


쳐다보지도 않아서 심지어 얼굴도 모름ㅋ. 




4. 

입국심사가 끝나고 공항에 나와 앉았는데, 


더이상 할 일이 없어지니까 갑자기 조금 막막한 기분이 드는거야. 기차 타는 시간까지는 좀 남았고.


탈출이 목적이라 정보따위 안 찾아보고 그냥 왔거든. 


공항에서 커피 한 잔을 사 마시고 가만히 앉아 있다가 그냥 버스타고 암트랙 기차역으로 이동했어. 유니온스테이션이라는 곳으로. 


가서 우왕좌왕하며 티켓을 발급하고 짐을 맡기고 (기차 이용객이 이용가능한 짐보관소가 따로 있더라고)


역앞으로 나갔어. 






새파란 하늘, 뜨거운 햇살과 찬 공기의 신선함. 


어 나 벗어났구나. 약간 실감이 나더라. 





역 앞은 엘푸에블로 라는 지역인 것 같았는데 거기 시장도 있고 Avila Adobe라는 멕시코 유적같은 집들이 남아있더라. 

 


구경하고 시장에서 엔칠라다를 사 먹었어. 허름하고 대충 만든 것 같았는데, 바삭한 옥수수전병에 소스가 어우러져서 맛있더라고.

그 뒤로 엔칠라다는 내 최애템이 되어버렸어.




로스앤젤레스에 Beautiful Los Angeles라는 수식어가 붙는 걸 가끔 들어.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사람들은 에이 거기 별로, 라고 동의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이때 로스앤젤레스가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새파란 하늘과 뜨거운 햇살, 쨍하게 찬 공기, 색색으로 꾸며진 거리. 


평소 음습한 걸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날은 오랜만에 티없이 밝은 걸 보니까 경외감이 들게 아름답더라. 


갑자기 모짜르트의 음악이 왜 아름다운지 깨닫는 것과도 비슷했어.




물론 이것은 그날 나의 감상일 뿐이지, 실제 로스앤젤레스는 그런 곳이 아니다. 그런곳이.




그렇게 돌아봤는데도 시간이 너무 남아서, 


안내데스크에 가서 근처에 볼 거리가 뭐가 있는지 물어봤어.


사실 데스크 가기 전에 용기가 안 나서 몇 분 정도 주변에서 망설였는데, 


정보를 찾을 도구가 없으니 별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결국 강제로 용기를 냈어. 


목소리 뒤집혀가며 어색하게 말을 했는데, 오늘 막 왔다고 하니까 친절하게 가르쳐주더라.


근처에 LA시청이 있는데, 거기 꼭대기 올라가면 전망대가 있다고 해. 그래서 꿋꿋하게 걸어서 LA시청으로 갔어.


전망은 잘 기억 안 나지만 시청 건물 안이 멋졌고 거대했고 근무하던 흑형들이 친절하고 잘생겼던 기억이 나.

 





5. 

시간이 돼서 기차를 탔다. 첫 열차는, 2박3일간 시카고로 가는 열차. 


하루는 일반 좌석에 앉아 가고, 다음 하루는 침대칸으로 옮겨서 타고 가기로 했어.


일반좌석칸으로 향해서 자리에 앉았는데, 


어떤 금발의 아가씨가 나를 보고 싱긋 웃으며 인사를 했어. 



"안녕"

"어디서 왔니? 

"어디 가는 길이야?"


이런 의례적인 질문을 하는데, 





그녀가 갑자기 의자 위로 다리를 끌어올리더니, 


가부좌를 틀었다.




히밤? 지금 얘 뭐 하는거냐?ㄷ



그러더니 나한테 어떤 늑대가 그려진 종이를 보여주더라.



<늑대 명상 워크샵>



뭐????


이 늑대 맞음.jpg




"이 워크샵은 정말 삶을 바꿀 소중한 경험이었어

혹시 기회가 되면 너도 한번 관심을 가져봐.

네 삶도 의미 있게 바꿔줄 거야"




어쩐지 이상한 말을 남기며 내게 친근한 미소를 지어보이던 그녀는, 


갑자기 옆에 다가온 어떤 가족과 대화를 나누더니 다른 자리로 사라졌다. 


자기 자리가 아니었던 것인지 자리를 바꿔줬던 것인지는 기억이 잘 안 난다. 


사실 그녀와 억지로 긴 대화를 해야하지 않아도 돼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렇지만 그가 보여준 늑대 명상 워크샵이라는 기묘한 글과 그림은 


뭔가 앞으로의 여행에 대한 표지처럼 느껴졌달까.




드디어 열차가 움직였다.



투비컨티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