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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생각들

편두통의 예술

0.

언제나 전조증상이 나타난다.

머리가 멍하고 소화가 안 되며 으슬으슬 떨리고 식은땀부터.. 감기 몸살 초기와 비슷하다.

 

이때 감히 약을 먹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두면,

 

1.

빛이 압력을 지닌 덩어리가 되어 안구를 묵직하게 누르고

숨어있던 소리들이 슬금슬금 기어나와 증폭되어 뇌를 어지럽힌다

뒷목부터 귀 뒷편 라인을 타고 기어오르는 통증 줄기가 정수리에서 만나 부딪쳐, 충격을 흩뿌린다

 

쓰고나니까 뭔가 오글거리는데

딱 감지하는 그대로를 객관적으로 묘사한 것. 과장이 아니라는 게 함정.

몇 번이나, 검은 우주공간에서 뇌수가 그대로 폭발하고 눈알이 그대로 터져버리는 장면이 떠오른다

눈알이 3차원 구에서 2차원으로 변형되면서 선과 면과 색들이 이상하게 분해된다거나

아니면 뒷목에서 척수같은 신경줄기를 몽땅 꺼내서 잘라버리거나 아니면 몇천개의 줄기로 갈라 까버리는 장면이라거나.

그냥 고통에서 벗어나는 어떤 상상이라도 해야되니까, 다른 사람이 평상시에 극단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것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라도 하면 통증이 확 해소되고 카타르시스를 느낄 것 같은 기분이라서]

 

 

지금은 소리입자 하나하나가 매미로 화하고, 그 매미와 신경줄기 하나하나가 연결돼 있는 장면이 떠올라서 끔찍하다

장면이 끔찍하다는게 아니라 수천마리 매미 소리가 주는 고통이 끔찍하다

이게 한꺼번에 터졌을 때의 카타르시스를 생각하며 참고 있다

 

 

2.

너무 늦게 약을 먹게 되면

배가 아프고 토하고 싶은데 토하면 진통제를 같이 토하니까 최대한 참아야 한다.

처방은 오직 단일성분 진통제  다량

다량을 먹어야 해서 그런지 복합성분은 어느새 쇼크유발하기 쉬워짐

아까 전조증상 나타나기 시작할 때 미리 약을 먹었으면 지금쯤 괜찮았을텐데

내 잘못이지 뭘 탓하겠어

 

3.

그래서 생각하는 게,

만약 내가 표현에 재능이 있고, 마침 이럴 때 뭔가를 만든다면,

필히 미친놈 소리 들을만한 것밖에 나오지 않을 것 같다.

역으로,

계산되지 않은 살짝 미친 것 같은 콘셉트 작품 만든 새끼들 다 뒤져보면 편두통 환자 꽤 나올 것 같음.

의외로 이런 상태가 되면 대가리나 팔다리 없이 뭐가 뛰어다니고 베고 해체하고 재구성하고 이런게 굉장히 논리적이며 자연스러운 장면이 됨.

 

 

일단 의심되는 사람을 생각해 보면,

-살바도르 달리... 언뜻 봐도 편두통 한참 앓을 때 상상할(이 아니라 자동으로 떠오를) 법한 장면들을 표현함

-데이빗린치 감독... 역시 몇 장면을 생각하면 심하게 의심됨.

-각본가 중에 찰리카우프만... 이 사람 매우 심하게 의심됨.

잘 알진 못해도 린치나 카우프만을 좀 좋아하는 편인데 이런 날카로운 편두통적 논리-_-;; 같은 뭔가가 공유되고 있다.

 

지금 찾아보고 작품 따다붙일 정신은 아니니까 후보에 올려두고 나중에 찾아보겠음.

 

 

편두통적 논리는,

머리아픈 상태에서 이걸 제대로 표현할 의욕이 안 생겨서 대충 쓰자면,

일단 정서적인 부분이 거의 없고 (육체적 고통을 해소하기 위한 환상일 뿐) 이기적이고 잔인해 보이는데 무의미함(사회적 정서적 관계적 의미는 생각보다 없음)

하지만 잔인한 장면들에 모두 수학과 같은 논리가 있음. 고통에 고통스러워하는 감정을 표현하는게 아니라 고통의 발생 진전 해소 이런데서 나오는 나름의 상징논리가 있다고 해야할까.

단지, 일상적 기준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논리체계일 수도 있겠지만, 고통 해소 프로세스에서는 사실 매우 자연스러운 논리이며 장면들이 됨

 

 

 

 

 

 

아 머리가 조금씩 멍해지고 둔해져가는게

이제 조금씩 약이듣기 시작하나보다...

빛의 무게가 조금씩 줄어들고 있어. 짓눌린 눈알이 다시 제 모양을 찾아가는 기분이다.

다행이다. 살려주셔서 고마워요. 진통제님

 

 

 

 

그런데 난 일하러 가야겠다. ㅡㅏㅏㅏㅏㅏㅏ

 

 

 

 

 

 

p.s.

다른 편두통(migraine) 환자가 혹시 이 글을 보게 되면 언제든지 꼭 댓글 남겨주길.

다른 편두통환자와 편두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어서, 타인들은 어떤 기분인지 궁금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