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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갑했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그런데 감정에 머물러보고 싶었다.
나는 감정을 빨리 정리하고 구조화하고 해결책을 찾는데 익숙한 사람이다. 그게 너무나 익숙해서 불편한 것을 해결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는 것이 항상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 시도해보기로 했다. 아래는 그 과정이다.
- 매우 갑갑함. 이 갑갑함의 원인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되는 것인지가 머리에 쫙 떠올랐음. 그러나 참고 갑갑하구나를 계속 봤음
- 이것은 두려움에 의한 것이었음. 몸이 어떤지 느껴보았음. 배 안이 부글부글 끓고 그것이 곧이어 어깨를 타고 목으로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음
- 배 안쪽이 이미지로 보였음. 불이 타오르고 있음. 지옥불이 타오르다가 허연 연기로 막 덮이고, 그 연기가 미처 빠져나가지 못해 몸이 갑갑한 것이 느껴졌음.
- 좀 지나니 그 곳이 일본의 시코쿠라고 함. 시코쿠의 지붕이 보였음. 아무 것도 없고 뿌연 연회색의 공기에 시코쿠가 있음. 시코쿠는 일본에서 죽음과 가까운, 마지막 땅의 이미지. 결국 이 곳은 죽음과 무였음.
- 뱃속 시코쿠를 보는데 무서웠음. 계속 보고 있다보니, 바닥이 없었음. 그냥 공중에 떠 있는 것도 아니고, 형체가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비정형적이었던 것. 완전히 아무 것도 없음. 이것이 라캉계 사람들이 말하는 실재에 가깝다는 느낌이 들었음. 너무너무 무서웠음.
- 그것이 무서운 이유는, 사실은 이 상태가 모든 존재의 기본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였음. 그러면 나는 어떻게 힘을 내서 살아가야 하나.
- 뭔가 해보려고 하자, 다시 연기가 피어올랐음. 나는 리비도를 치약처럼 짜서 넣고 있었음. 욕망이 없음에도 욕망을 짜내고 있었음.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음. 나는 어릴 때부터 삶이 텅 비었다고 생각했으며, 억지로 리비도를 짜내며 살고 있었다는 것을.
- 리비도 자체가 없다는 이야기가 아님. 그냥 나의 욕망이라는 것을 살아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임. 여하튼 이것은 내 리듬에 맞지 않았음. 피곤해서 모든 걸 놓고 계속 연소시켰음.
- 호흡을 시작. 입으로 내쉬면서 연기를 내뿜음. 조금 편해짐
- 아무것도 없는 이 무의 허무한 상태가 바로 존재의 기본임. 우울함 등의 감정과는 전혀 다름. 진짜로 없는 거. 그런데 이 없는데서 뭔가 처음부터 만들어내 살아가야 한다는, 그 무거운 책임이 나를 짓눌렀음. 다시 연기가 차오름.
아직은 더 어떻게 살아가야할지는 모르겠음.
생각나면 더 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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