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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생각들

어떤 기억.


1. 

정말 세상에 필요한 것은, 

진실을 파헤치겠다며 의심하고 뒤틀어보고 지랄하는 인간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헛될지언정 용기를 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허상에 빠지지 않고 현실, 이면을 냉철하게 직시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지만, 

그거야 말로 사람을 한계짓는 망상일지도 모른다.

냉정한 현실이든 이면이든 이런 것이야말로 오히려 또 하나의 허상일지도 모르니까.



그런 의미에서 그 수많은 자기계발서들이 도리어 훌륭한 일을 하고 있을지도.




2. 

오늘 갑자기, 

내가 그렇게 시니컬하게 대하던 '한낱' 자기계발서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3.

그때 나는 뿌리까지 지쳐 있었다.

이대로라면, 당장 말라 비틀어져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살아가는 건 그냥 좀비와도 같다고 생각했다.

반세기 후까지의 내 인생이 훤히 예측되는 듯했다. 빤히 들여다 보이는 삶 같은 건, 그저 노예일 뿐이다.



무작정 여행을 떠났다.

아무 목적도 없었다. 사람과 말하기도 귀찮아서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냥 발길 닿는대로 걸었다. 그렇게 몸을 움직이니 살아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 기분을 확인하기 위해 계속 정처없이 움직였다.

그렇게 걷다 버스를 탔고, 자리에 앉는 순간, 문득 내가 열 두시간 만에 앉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욱신거리는 발을 살펴보니 피가 배어 있었다. 

그렇게 나는 좀비처럼 내가 뭘 찾는지도 모르는 채, 마냥 움직였었다.



그곳은 내가 그리워하던, 꼭 다시 방문하고 싶던 도시였다. 

그러나 막상 도착하니 모든 게 무의미한 것처럼 느껴졌다. 

여기서 관광계획이나 세워서 관광따윌 해 봤자, 내 삶이 근본적으로 변할 수 있을까?




갑자기 깨달았다. 


어떤 종류의 예측된 행동도 내 삶을 바꿀 수는 없다는 것을.


내 삶을 바꾸려면, 내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자극을 받아야만 한다

내가 계획한 대로 움직이는 삶이란, 결국 반세기 후까지 훤히 들여다 보이는 좀비와 같은 삶과 다름 없어. 내가 그렇게 피하려고 했던.





4. 

갑자기 모든게 간단해졌다. 

현대물리학이든 사회학이든 불확실성에 관련한 다양한 이론들 있잖아.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을 안다'로 귀결되는.

뭐, 그래. 어차피 모르는 건데, 이렇게 그냥 헤매보는 거지. 

다음날도 그냥 걷기 시작했다.

쭉 걷다보니, 비가 내렸다. 응, 비 오면 맞으면 되잖아. 그냥 차도를 따라 쭉 걸었다. 걷다 보니, 눈 앞에 강이 보였고 어떤 지명을 알리는 싸인이 붙여있었다. 굉장히 예쁜 이름이었지만, 사람들이 위험하다고 하는 곳이다. 이렇게 맨 몸으로 걸어 들어가다가는 죽을 수도 있겠지. 그냥 다시 돌아가자.



어라?

그런데 왜 나는 이 도시를 벗어나지 않으려 하는걸까?

단지 예전에 좋았다는 이유만으로?

갑자기 나란 인간이 편협하게 느껴졌다.

자유롭게 떠도는 시늉을 하지만, 결국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만 움직이고 있구나.




5. 

나는 여행할 때 학교라는 곳에 굳이 찾아가지 않는다. 

여행하면서 다른 지역의 학교나 기업 등을 궁금해 하며 찾아가는 사람들이 눈에 띄곤 하는데, 나는 그걸 이해하지 못했다. 

뭔가 좀 병신같잖아. 마냥 착실하고 생각 없는 사회의 종, 모범생같은 느낌이고. 

겉으로는 인정하는 척 했지만, 짐짓 시크한 듯 나는 그들을 비웃었었다.



그것조차 내 편견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까고 보면 그냥 허세다.

그래, 학교라는 곳에 찾아가 볼까?

도시 경계에 있는 어떤 학교를 찾아갔다.







6. 

학교는 평화로웠다. 

어느새 비가 걷히고 P강이 반짝반짝 예쁘게 빛났다. 아 이렇게 예쁜 강이었구나. 매료돼서 십여 분간 강을 바라봤다.

학교 운동장을 지나며 야구를 하고 있는 한무리 학생들이 눈에 띄었다. 그들을 지나쳐 걷다가 도서관 앞 잔디에 앉았다. 

나무. 커다란 나무가 보였다. 굵기로 보아 백 년은 족히 넘었을 것 같다. 그렇게 오랜 세월 한 자리를 지켜온 나무를 보면 어쩐지 경외심과도 같은 복잡한 느낌이 든다. 나무를 이해할 수 없지만 나무를 안아보고 싶은 기분. 기분만으로 그치고 그냥 멍하니 나무를 바라보다가, 일어나 어떤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갑자기 나타나 사진을 찍어달라는 사람에게 사진을 찍어주고, 왜 사진을 찍었는지 이유를 듣고는 이 곳이 꽤 유명한 관광지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 사람은 쾌활하게 다른 유명한 관광지를 또 안내해주었다. 어쩐지 나도 모르는 힘이 나를 이끄는 느낌이었다. 본의 아니게 관광을 하고는 학교 문 밖으로 나섰다.



7.

학교 앞 서점에 들어갔다. 

행사하는 책이라도 있는지 한 번 쭉 훑어보고, 도시로 이동해야겠다.

책장을 쭉 훑어 보다가, 청록빛깔 표지의 어떤 책을 집어들었다. 나무와 하늘을 합친 색이네. 읽어볼까?

....책장을 덮고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해가 져 있었다. 벅차올랐다.

당시엔 몰랐지만, 나는 오전과는 다른 사람이 돼 있었다.




8. 

지금 돌아보면, 그 책은 그냥 평범하게 낭만적인 자기계발서였다. 

뭐 그런 책들 있잖아. 시크릿이니 하는, 자기 암시 효과를 강조하는 서적들 말이죠. 그런 책의 일부다.

지금도 딱히 다른 사람에게 추천해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그 책은 기묘하게도 그 순간 내게 필요한 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내가 지쳐버린 이유, 내가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이유, 내가 스스로 용감하고 자유로운 듯 착각하지만 사실은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 내가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할지... 추상적으로나마 방향을 제시하고 있었다.




9. 

다시 말하지만, 그 책이 일반적으로 누구에게나 좋은 책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연히도 그 책의 메시지가 나의 상황에 맞아 떨어졌을 뿐이다.

여전히 자기계발서라는 장르 자체에 대한 회의는 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삶은 나를 어디로 이끌지 모른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계획해서 보이는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삶이 이끄는 대로, 솔직하게 몸을 던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삶을 주도면밀하게 계획하고 아는 대로 살아가는 것은, 

사실은 자기주도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스스로를 한계에 묶어버리는 행동일지도 모른다.




10. 

솔직하다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

자기중심적인 성향이라 어릴 때부터 항상 내가 누구인지, 무엇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 왔고, 그렇게 스스로에게 솔직하고 싶어했지만, 

결국 그건 그냥 남의 이론에 맞춰 나를 끼워맞춘 것에 불과했다.

사실 나는 내가 누군지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냥 어디선가 들은 이론들을 껴맞춰 나를 설명하려 했을 뿐이었던 것이다.


당연하다. 그건 '알'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냥 마음을 비워야만, 나도 모르게 알아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으니까.





0. 

요즘, 다시 헤매고 있다. 문득 날짜를 보니, 내가 정처없이 헤맸던 바로 그 즈음이다. 

섬광처럼, 잊고 있던 그 책의 이름이 떠올랐다.



물론 이 책이 나에게 지금도 해답을 던져줄지는 전혀 모르겠다.

그럼에도, 모든 걸 뒤로 하고 읽어봐야겠다.







p.s. 그때를 떠올리면, 

삶이야 말로 위대한 문학이라고 느끼게 된다.

아니, 문학이 삶을 반영하는 거였지 참.

의도하지 않은 한 순간 한 순간이 풍부한 배움과 상징으로 가득 차 있고, 

모든 사건의 끈이 정교하게 얽혀있다.


어떤 것들은 겪을 당시 그 의미를 바로 알아챌 수 있다. 

하지만 어떤 것들은 겪을 당시에는 미처 깨닫지 못하다가, 먼 훗날에야 비로소 알아채게 된다.



그때의 기억이 다시 미화되어 또 다른 제약이 되어 나를 속박하지는 않는 한에서, 

다시 마음을 비워봐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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