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잡생각들

world wide hogu


1. 호구


캄캄한 밤, 인적 드문 길을 걷는데 30대 초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길을 물어왔다.
'xx대학은 어떻게 가야돼요?'
'아.. 여기서 지하철 한 정거장 가야합니다'
'어... 걸어갈 수 있나요?'
'25분쯤?'
'윽...그럼 지하철역까지는 어떻게 가나요?'
'....따라오세요'


지하철을 탈 필요없는 내가, 이렇게 친절하게 따라오라고 말을 해 준 것은...
영어로 말을 걸었기때문이다. -_-;;;;;;
설명을 잘 못하기에 그냥 따라와라.. 안내해주마...라고 한 것.

그리고 지하철역까지 가는 10여분간, 뉴욕에서 왔다는 그는 이런저런 말을 걸어왔고, 나는 대충 이런저런 답변을 해 주었다.
그리고...
사실 그렇다. 어쩌면, 약간은 예상하고 있었다.
이렇게 길을 물어보는 것이 모종의 종교단체 수법일 수도 있으며, 마지막에는 약간의 돈을 달라고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는 나에게 순수한 영혼 드립을 치며 (도나기표 영이 참 맑으시네요를 미쿡말로 들으니 신기) 
결국에는 한국 길거리를 헤매고 있는 주제에 US달러밖에 없고 크레디트카드도 없다며(미국에서 와서 서울 길거리를 헤매는 사람이, 크레디트카드와 한화가 없다는게 이미 말이 안된다는 걸 왜 모를까.)
자기가 급하게 가야 해서 택시를 타야할 것 같은데 100달러짜리를 한화로 바꿔줄 수 있냐는 것이다.


예상대로의 전개였다.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부터 택시비를 타면 삼천원 정도 나올거라고 얘기해주며, 지갑을 보았는데, 천원짜리가 두 장밖에 없었다.
사실은 십만원에 해당하는 현금이 있었지만 당연히 그걸 꺼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고민....


결국 나는
그냥 만원짜리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가지세요.'
'네?'
'그냥..가지세요. 전 백달러 바꿔줄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돈은 없어요.'
'이거...받아도 돼요?'
'네. 그러니까 혹시 근처 지나가다가 줄 마음이 생기면 주세요. 올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감사합니다. 나중에 돈 갚아야 되니까 이메일 좀...'
'네(대충 이메일 적어줌)... 아 참, 저는 부유하지 않아요. 그럼 이만.'


하고 나는, 지극히 비합리적인 선택을 해 버렸다.
누가 봐도, 지극히 호구스러우며 길거리에 만원을 그대로 던져버린 멍청한 짓을 한 것이다.





2. 만약
내가 그에게 돈을 준 것은, 물론 내가 워낙 병신이어서 그렇긴 하지만,
만약, 1%의 확률로, 그가 정말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때문이었다.

실제로 나도, 정말 다급한 상황에서 지갑을 안 가지고 나와서 가지고 있던 소지품을 지나가는 낯선 이에게 팔려고 시도한 적도 있고...(결국그 분은 그냥 돈을 주었다 ㅡㅡ;)
막차를 타야 하는 상황에 현금이 없어서 같이 타는 승객에게 차비를 받은 적도 있었다.

게다가 다른 나라에서 여행하던 중, 
내가 어떤 사람인 줄 잘 모르는데도 하루 종일 친절하게 안내를 자청한 청년...
빗속에서 무거운 짐을 끌고 헤매다 체력이 소진돼 할 수 없이 탔던 택시의 기사님이,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 날 위해 친절하게 이곳저곳 물어가며 길을 찾아주고.. 기본요금만 받았던 일...
제대로 말도 안 통해서 차가움으로 위장한 긴장만 하고 있던 나에게, 갖고 있던 와인과 치즈를 대접하던 친절한 할머니...
자신의 행선지가 아닌데도 지하철 몇 번을 갈아타며, 다른사람에게 길을 물어가며 날 목적지에 데려다 주던 아저씨...
꼭 타야하는 교통수단이지만 이미 만석이 된 좌석에 절망하여 역에 멍하게 앉아있던 나를 위해 '이건 특별히...'라고 손에 입을 가져다대며 표를 구해주던 아가씨...


어떻게 보면 노숙자스러운 옷에 붙임성도 없고 어색한 웃음으로 예의만 갖춘, 외곬수 여행자에 가까운 내가 받은 그 도움을 생각하면,
수줍은 내가 차마 요구하지 못한 도움을, 그저 서슴없이 먼저 베풀어준 그들을 생각하면,
어쩐지 나 역시,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을 함부로 내칠 수만은 없는 것이다.

비록, 사기일 확률이 99%임에도, 1%의 확률로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일 수도 있으니까.
혹은 1%의 확률로 생각을 바꿀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비록 그런 확률이 없다고 해도,
누군가는 가끔, 그런 돌발 개병신 호구짓을 하기도 해야 세상이 조금 다르게 돌아갈테니까.
사회란, 어차피 합리에 근거하여 생성되고 돌아가는 것도 아니니까.


물론 내가 사기꾼의 조직구조를 강화시키는 병신짓을 했을 수도 있다.
자기만족을 위해서 궁극적으로는 사회질서를 분란시키는 짓을 했을 가능성도 크겠지.
하지만 내가 어떤 짓을 할지 모르는 만큼, 다른 사람도 어떤 짓을 할지 모른다.
그리고 평소엔 절대로 주지 않았을 것 같은 돈을, 갑자기 그렇게 주는 날도 생기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길거리에 만원을 던져버렸고, 이런 좃같은 희망의 중이병론을 지껄이고 있는 것이다.
이전에 호되게 당한 기억들은 모두 잊은 채.

그러니까, 당췌 학습이 안 되는 인간이다. 나는.

'잡생각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관용 부족  (4) 2012.03.18
[잡] 술자리의 게임들에 대한 단상  (2) 2012.03.10
[잡] 평생 보지 않을 너에게  (2) 2012.02.19
중2병에 대한 고찰  (8) 2012.02.14
스테이크  (2) 2012.0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