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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생각들

아름다운 날들

1. 전제

결국에는 날씨가 적절히 건조하고 따뜻하고 적절히 바람이 불어 육체가 쾌적함을 느끼고 있었고

거기에 지나치게 강한 빛이라던가 소리라던가 오물이나 악취 등 오감을 괴롭히는 것들이 없었기때문에

그리고 뭔가 해야한다는 마음의 압박이 없었기때문에

 

그래서 비로소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진 것이다.

 

 

그렇게 쾌적한 상태에서라면,

굳이 꽃이 흐드러지게 핀 나무 밑이 아니라

가지만 남은 늙수그레한 나무 밑에서라도,

혹은 쓰레기봉지가 바람을 타고 찻길을 건너가는 것을 본다 해도,

거대한 철골 구조물 뼈대만이 앙상한 날림 공사중 건물을 보거나

쓰레기 가루가 바람에 날아다니는 것을 보아도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이다.

 

하다 못해,

아무 특색없는 신도시의 똑같이 생긴 건물과 간판의 경멸스러움이나

혐오스러운 어떤 정치인의 두껍고 탐욕스러운 입술에서조차

마찬가지로 또 다른 종류의 아름다움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사실상 오감을 괴롭히거나 육체의 쾌적함을 방해하지 않는한, 아름답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는지 찾아보는 게 더 빠를 것이다.

 

쓸 데 없는 소리 그만 지껄이고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냥 '딱히 할 일 없고 쾌적해서 기분이 좋으니 다 좋아보임'임. 

사실은 그냥 그뿐인데 여러가지 형식으로 분화되고 포장될 뿐인 것이다.

물론 그 포장이 무의미한 것은 절대 아니지만, 삶을 바꿀정도로 대단한 것은 또 아닌 것이지.

아 물론 그 포장이 인생관을 반영할 수는 있겠지만.

 

 

 

 

2. 벚꽃

- 어쩌면저위의1번이야말로지상최대의자의식과잉헛소리일지도모른다. 

 

이 땅은 이렇게 시끄러웠지만,

올려다 본 벚꽃은 신비로웠다.

 

 

양적방법론을사용해 hypothesis를 쓰듯이 적어보자면,

'이 땅은 조도,습도,온도,풍력,풍향,그 외 각종 꽃나무 등의 장치로 인해 봄이 왔다는 심리적인 흥분이 유발돼 즐겁게 떠드는 분위기가 발생했지만'

 

막상 올려다 본 하늘과 벚꽃은 내 머릿속의 이미지 따위와 전혀 달랐다.

하늘은 이상할 정도로 적막하고 고요했다.

이상할 정도로 고요한 검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한껏 무겁게, 과하게 피어버린 꽃뭉치와 나뭇가지는 

볼을 끊임없이 간질이는 살랑대는 바람따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뻣뻣하게 굳어있었고,

간혹, 거센 바람에, 작은 발작이라도 일으키듯, 부르르 떨 뿐이었다.

하늘은 너무나 가까이 있는 것 같았고, 너무나 작아보였으며, 혹시 벚꽃을 도드라지게 하기 위한 인공장막이 아닐까 의심 갈 정도로

 

어.색.했.다.

 

 

 

그런 어색한 하늘을 배경으로, 뻣뻣하게 정지해 있다가 간혹 부르르 발작하는 우아하지 못한 몸짓의 벚꽃덩어리가

이상하게 너무나 신비롭고 매혹적이었던 것이다.

 

 

 

아 물론, 다시 반복하자면, 이것은 일차적으로 몸이 쾌적하고 마음이 가벼워서...라는 기본전제가 깔려있어서였지.

 

 

 

3. 대표격

이전에 칼라거펠트전에서 보았던 '행복한 표정'을 찍은 사진을 보고 그 어색하고 피곤해보이는 표정에 '저게 왜 행복한 표정일까' 의구심을 가졌던 적이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실제로 사람들이 행복할 때 짓는 표정은, 뭐 공통베이스는 있겠지만, 사실은 그렇게 일관되지 않을 수도 있는데,

미디어들이, 그 행복한 표정들의 '대표격'을 추출하여 보다 효율/효과적으로 내용을 전달하려 했기에

결국 내가 접했던 것들은 행복이 가장 과장되게 표현된 (표정이 복잡하다는 것이 아니다) 형태의 것들이었을지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 행복한 표정들은 일종의 클리쉐가 되었으며 (사실 표정 개별의 차이는 미묘한데다, 표정 자체는 인간 본능의 표현이라는 인식때문에 그다지 의심을 품지 않은 것 같다) 의심없이 사용되게 되었고,

그래서 '표정'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감정의 표현조차, 사실은 인간의 손을 타 왜곡된 상으로, 내 머리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벚꽃과 하늘이라는 가장 우아하고 '자연스러운' 것들

어찌보면 그냥 미디어에서 대표격으로 내보낸 이미지를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사실은 그냥 자연적이라는 것들 중에서도 이렇게 '어색한' 변종들이 얼마나 많이 있을까.

그리고 그 어색한 변종들이야말로 그냥 흔히 존재하는 것들이 아닌가.

 

 

그렇다고 이건 그 '대표격'이 왜곡을 조장하니 쳐부수자는 것은 아니고, 그냥 그것이 규범적인 대표이미지이며 실제로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는 점 정도는 항상 의식하고 살아야겠다는 것 정도다.

사실상 효율성이라는 게 절대적이지만 않다면 얼마나 편리한 도구인가. 하나가 잘못됐다고 전체를 매도하는 짓은 곤란함.

 

 

 

규범이라는 것도, 결국 최종적으로는 내 머릿속에 형성된 것이니까 말이야. 그냥 내가 잘 하자고.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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