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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월드

THE HOURS

1. 거대함선

내가 서 있는 이 곳은 거대함선. 함선은 빅토리아조의 느낌이었다. 화려하고 거대하고 복잡한 미로와 같았다. 인류가 영원히 발전하고 번영할 것 같은 희망을 불러일으켜 주는 거대 함선. 

거대한 함선에 물이 새고 있었다. 나는 중년의 남자 어른과 여자 몇 명과 함께 안전한 곳에 서 있었다. 중년의 남자는 웃고 있었어. 그는 나를 보며 친절하게 말했다. 


"여기 가만히 있으면 안전하다고. 그러니까 침착하게 있어요."

"...아 그런데..!"


나는 누군가 안에 있다는 걸 불현듯 깨닫고 중년의 남자를 돌아봤다. 그는 다른 여자들과 뭔가 어른의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 더 이상 나를 신경쓰고 싶지 않다는, 이제 이 정도까지 친절하게 안내해줬으면 스스로 알아서 하라는 어른의 냉정한 합리가 느껴졌다.


나는 누군가를 찾으러 함선 안으로 뛰어들어갔어그 누군가가 누군지 나도 몰랐지만, 금방 찾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지. 딱히 생명을 구하겠다는 사명감은 없었어. 뭐, 그냥 둬도 혼자 나올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냥 다들 바빠보이니까 한번 나도 찾으러 다닐까 싶었던 거지. 다들 바쁜지 아무도 나를 신경쓰지 않았어. 내가 들어가는 것을 모르는 눈치였지.






2. 쌍둥이 자매

혼자 함선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고 생각했는데, 왼쪽에 뭔가가 보였어. 금발머리의 10세정도 된 작은 여자아이였지. 

'똑똑하게 생겼네'

그는 싱긋 웃어보였어. 그리고 누군가 오른손을 땡기는 느낌에 돌아보니,

'어? 너 방금....아 쌍둥이구나'

두 여자아이는 완전히 똑같이 생겨서 구분할 수가 없었어. 둘다 귀엽고, 재빨라보이고, 똑똑한 느낌. 헤르메스를 둘로 쪼개면 이런 느낌이려나.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었어. 배 안은 생각보다 더 심각한 상태였으니까. 메인로비의 짙은 목조 계단참에 물이 투투두둑 떨어지고 있었어. 모서리 부근에서는 물 줄기가 대리석기둥을 따라 쏴아 소리를 내며 쏟아지고 있었지.





3. 헤매기

함선은 미로와도 같았어. 나는 길을 기억하려 애쓰며 그 '누군가'를 찾아 로비 왼쪽의 어두컴컴한 복도로 몸을 돌렸다.

로비는 아직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지만, 복도는 컴컴했어. 그래도 첫번째 복도는 로비에서 새어나오는 빛으로 무리없이 걸을 수 있었지만, 두 번째 복도부터는 암흑을 품은 듯 컴컴했다.

쌍둥이들? 웬지 쌍둥이들은 이 배에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어. 그래서 쌍둥이들 걱정은 잠시 접고, 나 혼자 누군가를 찾아 뛰었어.


자, 복도를 몇 번 가야하지? 한 번, 두 번, 세 번. 

그렇게 컴컴한 복도를 지나자 화려한 빅토리아식 응접실이 나타났어. 로비와 비슷한 형태인데, 바깥 창문이 없어. 완연한 배의 내부인 것 같아. 어슴프레하게 하얗고 차가운 조명빛이 있어서 다행히 내부를 볼 수 있었어. 


짙은 코코아빛의 무거운 나무장식이 하얀 벽을 고전적인 느낌으로 꾸며주고 있었어. 바닥에는 카페트가, 천장에는 샹들리에가 달려있었지. 귀족들이 차를 마시던 곳일까? 그래도 장식은 튼튼하게 붙어있는 것 같아서 물이 새는 함선에서도 아직은 위험하진 않아보였어. 문제는, 사방으로 다시 같은 모양의 복도가 뻗어있었다는 것이지. 


'이거 완전히 미론데? 벽에 표시라도 해뒀어야 했나'

책에서 본 중세의 미로찾는 법 등이 그제서야 떠올랐는데, 사실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없었어. 어쩔 수 없지. 금방 찾을거야.







4. 금발의 쌍둥이 자매II

복도를 지나자 불이 완전히 꺼져 더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고. 여긴 아닌 것 같아 다시 응접실로 돌아갔어. 함선을 뛰어다녔어. 화려한 응접실에서 왼편으로 꺾어 복도를 두어번 거친 후였나. 또 다른 응접실이 나오고, 그 바로 옆 복도의 방에서 빛이 새어나왔어.

문을 확 열어제끼자, 


하얀 피부에 백금발의 자매가 나를 올려다봤어. 십 오세쯤 됐을까? 한 명은 바닥에 앉아 그림책을 읽고 있었고, 한 명은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있다가, 날 보고는 안경을 고쳐 썼어. 그래도 이 방은 노란 조명이 따뜻했고, 침대는 푹신해 보였어. 허연조명에 물이 떨어지는 바깥세상과는 달랐지. 


보자마자 알 수 있었어. 내가 구하려던 사람들은 이 자매였다는 걸. 


그들은 전혀 다급하지 않은 표정이었어. 안경을 쓰고 헤어밴드로 이마를 드러낸 소녀는 심지어 무슨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모르는 듯했지. 그 아이의 얼굴을 보자, 약간 지능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았어. 다른 아이는...


'자매를 버리고 혼자 나가지 않겠다는 것이었나.'


감상하기에는 내 마음이 급했어. 한 손에 한 명씩 그들의 손을 붙들고 얼른 방을 나섰어. 어느새 응접실에 물이 차올랐어. 위험해. 

거기에다, 똑같은 응접실과 복도를 보다보니,




길이 잘 기억나지 않아.





5. 다시, 쌍둥이자매

그제서야 만용을 부렸던 내가 원망스러웠어. 내 머리로 뭘 기억한다고. 중세 수도사 방식대로, 착실하게 한 쪽 벽에 표시를 하면서 나아갔어야 했어. 아니면 실타래를 풀던가... 아리아드네가 알려준 것처럼. 아 실타래는 수중에 없었구나. 지금 후회해도 소용없어. 어떻게든 해야해. 혼자라면 어떻게든 해보겠는데 양손에는 쌍둥이가 있어. 그 중 한 명은 심지어... 약간 도움이 안 될지도 몰라. 힘이 빠진다. 안돼, 그러면 안돼.


다리에 힘이 풀리던 내 몸을 누군가 쭉 들어올렸어.


똑똑한 쌍둥이 자매였어.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르겠는데, 그들은 전차의 바퀴처럼 각기 내 왼쪽, 오른쪽 허벅지를 가볍게 받쳐들고 뛰었어. 길을 아주 잘 알고 있는 느낌이었지. 그들이 나타나니 그렇게 안심이 될 수가 없었다. 

'헤르메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러고보니 12별자리의 쌍둥이자리가 헤르메스를 의미하기도 하는구나.

백금발 쌍둥이 자매는 그들의 옆에서 함께 뛰었어. 안경을 쓴 아이도 자연스럽게 함께 뛰었어. 이 아이가 제 몫을 못할거라고 생각한 내가 너무 부끄러웠어. 그들의 도움으로 간단히 밖으로, 무사히 나갈 수 있었어. 마침내 로비가 보이고 바깥공기를 마시게 됐을 때 미칠 것 같은 안도감이 밀려왔어.




6. The Hours

그리고 바깥 공기를 마시는 순간, 알았지. 배 안의 공기가 '흐르지' 않고 있었다는 걸. 

공기가 텁텁했다는 이야기가 아니야. 숨은 잘 쉴 수 있었으니까. 모든게 술래잡기 할 때 '얼음'을 외친 것처럼 정지해 있었다는 이야기도 아니야. 물은 끊임없이 새고 있었고, 나도 쌍둥이도 움직이고 있었어. 

그저, 배 안의 공기를 가득채운 미세한 그 입자들이 언제부턴가 그저 그 자리에 끝없이 있어왔던 것 같았어. 몇 십년이고 몇 백년이고. 




마치 언제부턴가 세월의 영향을 받지 않은 채 그 곳에 고이 머물러있던 느낌이었어. 



함선만의 시간은 이미 정지했고, 바깥세상과는 별개로 고이 그 자리에 존재해왔던 것과 같은.

그러니까 함선 안에서는 언제까지나 물이 새고 있고 응접실은 허연 불이, 복도는 컴컴하며 쌍둥이는 노란불빛의 침대방에서 그림책을 함께 읽고 있을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었어.



함선 밖으로 나온 내 앞에 중년 아저씨의 웃는 얼굴이 눈에 띄었다. 

그들은 내가 나오는 것을 보고는 '응 잘 했네'라는 듯이 고개를 까딱거렸어. 마치 경찰서에 잘 보관돼 있는, 잃어버린 지갑을 찾아가지고 온 듯한 반응이랄까. 간단한 심부름을 잘 해냈다는 그런 반응. 이게, 간단한 심부름이라고?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한 거야, 모두 마시자구.' 손에 음료 캔을 하나씩 들고 있었어. 마음을 가라앉힐 필요가 없을 정도로 침착해 보였지만. 그들은 할 일은 모두 이성적으로 처리했다는 전문가의 자신감 같은 것을 보여주고 있었지. 

경멸을 느낄 새도 없이, 그 싸구려 음료캔의 가벼움에 안도감이 느껴졌어. 손에 쥐고 찌그러져서 소멸될 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소멸할 활성물질. 나는 시간의 지배를 받는 곳에서 숨쉬고 있었어. 나는 살아서 온전히 늙어갈 거야.



쌍둥이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나를 도와준 쌍둥이도, 내가 구출해온 쌍둥이도 눈에 보이지 않았어. 

뭐 어딘가 안전하게 섞여있을 것 같아서 걱정은 되진 않아. 단지.



내 몸에 세월이 흘러지나가도 함선은 그 자리에서 고요히, 언제까지나 위급한 그 상태로 머물러 있겠지.

단지,



나는

정말로

쌍둥이를

구출한 것일까.








p.s.

지금 생각하니, 세월호와 서양의 참사 (스웨덴인가 노르웨인가... 혹은 타이타닉)가 무의식중에 발현된 꿈인 것 같기도 하다.

세월호 사태때 전국민이 우울하다며 노란리본을 달았을 때도 솔직히 이런 일이 일어난데 대한 시스템의 부재, 책임 떠넘기기, 관료주의의 폐해가 먼저 다가와 분노가 앞섰을 뿐, 감정적으로 동조하진 않았었다. 뻔히 돌아올 수 없는게 보이는데 노란 리본을 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 개개인을 내가 알지 못하는만큼 개인에 대해 감정적으로 동조하고 슬퍼하는 것은 나로선 도저히 불가능했고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꿈을 꾸고 나서 이상하게 가슴이 먹먹했어. 지금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당황스럽다. 슬프지도, 분노스럽지도 않다. 동정심 같은거 하나도 없어. 특별히 아무 감정도 느끼고 있지 않아. 그런데 왜 먹먹한 채로 눈물이 흐르는 걸까.


그래서 꿈을 적어내려갔다. 나는 왜 먹먹한 걸까.


주제가 명확한 글을 좋아한다. 그러나 억지로 주제를 끼워넣고 정리하기 싫었다.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한 무리한 삭제 정리작업 따위 자기계발서와도 비슷하게 느껴졌다.



그대로 끝내버렸음. 일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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