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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월드

분홍 코끼리

분홍 코끼리와 함께 

세상은 멸망을 향한 첫 걸음을 디뎠다.


커다란 도로는 광장이 돼 있었다. 도로의 전후좌우를 막아두어 마치 광장처럼 보였다. 광장 안에는 사람들이 서로 밟고 밟히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쓰러진 사람들은 죽어있었다. 피를 뒤집어 쓰고 울부짖는 사람들도 이미 감염된 기색이 역력했다.


도로 앞에는 커다란 분홍 코끼리가 난동을 피우고 있었다. 습기 많은 남쪽 어디선가 올라온 듯한 이 코끼리는 고개를 휘두르며 '푸슈루루' 피를 뿜었다. 벽돌색 액체가 사람들의 몸에 튀었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다. 그들이 도망가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저 피를 맞은 사람들은 이미 감염됐어. 그래서 도로의 전후좌우를 이렇게 막아둔거야. 감염이 확산되지 않도록.


군인들이 코끼리를 보호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아니라 코끼리를. 뭐? 왜 사람들을 보호하지 않는거야? 외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군인의 본질은 파괴다. 코끼리를 자극하는 것도 군인이었다. 그러니까, 코끼리도 사람들도 모두 피해자야. 어떻게든 이 상황을...


...이라고 생각했지만 일단 나는 감염되지 않기 위해 도망ㅋ을 가야 했다. 도로를 막은 울타리를 죽 따라가다 보니, 빌딩들 사이로 좁은 틈샛길이 보였다. 그 틈샛길로 들어가 걸었다. 바닥에 깨진 술병이 보이고 존재감 없이 살아왔던 노숙자가 고개를 들었다. 노숙자를 보니 도리어 안심됐다. 지금은 존재감 없는 것이 생존의 지름길이니까. 눈에 띄는 순간 군인들에게 잡혀들어갈지도 모르니까. 


좁고 더러운 길을 지나자, 갑자기 학교가 나왔다. 학교는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샛길을 넘어가면 그야말로 아비규환인데 이 학교는 이렇게나, 아무 것도 모르는 듯 조용했다. 왜... 묻고 싶었지만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학교 강의실로 가려면 언덕을 걸어 올라가야 했기에, 나는 날기로 했다. 나는 것은 오랜만이었지만, 그건 자전거 타는 기술과도 같아서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몸을 수직으로 죽 띄워 높이 올라간 후, 앞으로 날아갔다. 그렇게 가다가 K양과 S교수를 만났다. K양은 내가 날고 있는 것을 보고 의미심장하게 바라봤으나, S교수는 태연했다. 

"몸을 50cm 정도만 띄우고 길을 따라 날아가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아, 그랬어. 이 분도 나는 법을 아는 사람이구나. 친근한 마음에 나는 웃으며 S교수의 팔짱을 꼈다. 내가 나는 방식이나 S교수가 말한 방식이나 마찬가지라고 반박하고 싶었으나 직각삼각형에서 대각선 루트가 가장 짧다는 것을 생각하니 교수가 더 효율적이었기에 닥쳐버렸다.


그렇게 세상은 쓰러지고 있었지만, 학교는 아무 것도 모르는 듯 평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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